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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 밀란 쿤데라 본문

나의 서재/review

농담 - 밀란 쿤데라

루밤 2015. 3. 24. 00:15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은건 처음이 아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읽었었고, 작년 쯤에 '불멸'도 읽었다. 처음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이 기억에 난다. 보통 하나의 화자로 책 전반을 가로지르는 형식만 많이 봐오다가 챕터 마다 화자가 바뀌고 그 화자마다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나도 직업적으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지만 (전혀 문학적인 글은 아니지만), 글을 계속 쓰다보면 나만의 패턴이 생기게 된다. 내가 쓰는 패턴 대로 써는 것은 글을 좀 더 쉽게 쓸 수도 있지만 그 방법으로 쓰는 것이 나에게 제일 잘 맞다는 뜻이다. 굳이 억지로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


이번에 농담을 읽으면서 밀란 쿤데라 글의 패턴을 느낄 수 있었다. 표현력이 부족해 뭐라 말로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유려한 문장은 여전하고 구성 방식이 화자를 넘나드는 것도 비슷했다. 날카롭고 철학이 녹아들어있지만 이해하기 어렵거나 진도가 안나가진 않는다는 것도..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 루드빅은, 20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너무나도 미성숙한 나이-에 사소하고 시시한 농담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왔던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그 여파는 너무나도 커서, 그 이후의 인생에서 내내 사로잡혀 있다. 인간관계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하지만 그게 정말로, 한순간에 단 한번의 농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완전한 우연은 없다. 내가 그동안 쌓아왔던 내 행동, 태도 들이 쌓여서 어느순간 그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결말에서 어떤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는 누구와 행복해졌고 그 다음에는 어떤 삶을 살았고,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인 루드빅의 깨달음. 그 순간에 끝이 난다. 








농담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9-06-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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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절대 내 이름과 연관되지 않을지어다, 푸칙의 이 문장은 나의 경구이다, 고문당할 때나 심지어 교수대에서까지도 푸칙은 결코 슬픔에 잠기지 않았다, 이제 기쁨 같은 건 촌스러운 것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란 없다, 아무리 심각한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내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당시 또 하나의 유명한 경멸어)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이 판단을 내렸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곧 내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삶이 연속성을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 이제 나는 결국 아무 가망 없이 내가 지금 놓여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마저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나는 타인과 함께 나누는 유쾌한 기분에 취하는 것을 느꼈다.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그 어떤 보장도 내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나의 관계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는가? 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

 

그는 자신의 광신적 역할을 맹목적으로 그리고 꿋꿋하게 해낸 것이었다. 느닷없이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든가, 또 더 이상 개의 탈을 쓰고 대열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든가, 그만 힘이 다하고 말았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내 친구는 아니었다. 집요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내게 아주 낯선 사람이었지만 그 운명으로 보면 누구보다 내게 가장 가까온 사람이었다.

 

영원속에 사는 사람은 슬픔을 모른다.

 

나는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신의를 지키는가에 있다고 본다.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말없는 향수처럼, 내 안에 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을 열망하듯 그렇게 그녀를 원했다.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가 하면, 누가 자기는 무어가 좋고 무어가 싫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으면 그것을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당신은 인류 전체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래로 당신은 인류에게서 믿음을 거두어버렸고 증오를 퍼붓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그런 식의 증오는 끔찍한 것이고 죄악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증오는 당신의 저주가 되어버렸어요.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 나에게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